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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하루키 원작에 입혀진 일본영화의 감성, 차와 사람,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 드라이브 마이 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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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고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던 하마구치 류스케(濱口竜介)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았다. 

하마구치 감독은 1978년생으로 올해에만 '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각본상을 수상하며 일약 주목 받는 감독 대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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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극적으로 치닫지 않는 잔잔함 속에 하루키와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대사와 감정들을 잘 보여줬다. 

남주 니시지마 히데토시(西島秀俊)는 1971년생으로 1992년 드라마로 데뷔하여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한 베테랑으로, 극중에서는 연출가 겸 배우인 가후쿠(家福) 역을 맡았고, 그 역할로 올해 보스턴비평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깊은 상처를 가졌지만 드러내거나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역할을 잘 소화했다.

여주 미우라 토우코(三浦透子)는 1996년생으로 6살이던 2002년 아역으로 데뷔해 줄곧 활동하고 있는 배우로 올해 역시 드라이브마이카로 타마영화상 신인여배우상, 요코하마영화제 조연여우상을 받았다. 극중에서는 전개상 중반쯤 무존재처럼 등장하지만 결말로 다가갈수록 존재감이 커지는 가후쿠의 드라이버 미사키 역을 맡았다. 놀랍게도 홋카이도 삿포로 출신으로 아마 이런 점도 캐스팅에 참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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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가후쿠의 아내이자 극작가였던 오토(音) 역의 키리시마 레이카(霧島れいか)는 1972년생으로 1998년 드라마로 데뷔한 베테랑이다. 섹스와 오르가즘을 통해 스토리를 생각해 내고 기억을 잘 하지 못하면 남편인 가후쿠가 다음날 그걸 말해주면 대본화하는 패턴을 갖고 있다. 어린 딸을 잃고 나서 깊은 상실에 빠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쓴 대본이 어떤 문학상에서 수상하며 각본가가 되었다는 설정이다.

의외로 칸에는 소냐가 동행했지만, 감독 좌우의 두 명이 이 영화의 히로인들이다.

오카다 마사키(岡田将生)는 1989년생으로 2006년 데뷔 후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수상경력도 많다. 극중 다카츠키라는 배우 역할을 맡았는데 오토의 섹파(보다 약간 깊은 관계였을 수도..)였지만 여자와 가볍게 잘 사귀고 자기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때려 숨지게 해 체포되는 바람에 가후쿠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아내의 극본을 연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 영화엔 3명의 한국 배우가 등장하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한국이기도 하다. 우선 진대연(1981년생) 씨가 가후쿠를 감독으로 기용한 조직의 연출가인 공윤수 역을 맡았는데, 한국에서 활동하다 벙어리인 아내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와 정착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어, 한국어, 일본어를 구사하며 아내를 위해 수화를 배운 다정하고 차분한 남자 역을 잘 소화했다.

1993년생인 박유림씨는 이 영화에서 이유나 역을 맡아 수화로 감정연기를 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극중 이유나는 오토가 쓰고 가후쿠가 연기하는 연극의 여주 역할로 캐스팅되어 수화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연극은 일본에서 일본 관객을 대상으로 하지만 다양한 언어를 하는 사람들을 캐스팅해 외국어를 무대 뒤 스크린에 자막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으로,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데, 그런 연극의 여주가 수화로 연기를 한 것이다. 가후쿠의 아내 이름이 오토(音)라는 점도 소설의 장치 중 하나일 것이다. 마지막 바로 직전 장면에서 가후쿠를 앉혀 놓고 그를 감싼 상태에서 "아픔과 상실 속에서도 하루하루 더 잘 살아가요"라는 메시지를 수화로 연기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그 외에 안휘태, 소냐 등이 연극배우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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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드라이브 마이 카"이다. 2014년 출판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나는 아직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통해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루키답게 인간 내면의 상실과 고독, 상처를 잘 그려내면서도 그걸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안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잘 그려냈다. 이런 스토리가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한 서정성으로 잘 표현되어 보는 내내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자동차가 매개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남주 가후쿠가 아끼는 오래된 사브(SAAB)는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원작에서는 이 차가 사브 900 컨버터블이며 황색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사브이긴 하지만 컨버터블은 아니고 색깔도 빨간색이다. 가후쿠는 이 차를 아끼고 대중교통이 아닌 차로만 이동하는 사람인데,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감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날 사고가 나 (원작에서는 이 사고로 면허가 정지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병원에서 녹내장 판정을 받지만 운전에 집착하는 남주.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연극의 감독을 맡아 장거리 운전을 하고 갔지만 극단에서 과거 외부연출가의 사고로 애를 먹었다며 반드시 자신들이 고용한 기사가 차를 몰아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가후쿠와 미사키가 만나게 된다.

이 일이 있기 전 어느날 아내인 오토가 돌아오면 얘기 좀 해 라고 말하자 남주는 이 차로 하루 종일 방황하다 늦게야 집에 돌아오고 쓰러져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지주막하출혈로 아내가 사망한 것. 그러나 가후쿠는 이 일로 큰 상처를 받는다. 내가 그 때 좀 더 일찍 들어갔더라면...하지만 이미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그는 아내의 말에 결의가 들어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은 그 현실과 맞서기가 두려웠다고 말한다.

아내의 불륜남이었던 다카츠키가 자신이 연출한다는 사실을 알고 히로시마까지 와서 오디션을 보고, 연출진의 의견에 다라 그가 남주 역으로 캐스팅되지만 살인을 저질러 체포되면서 가후쿠는 여기서 연극을 중단할지, 자신이 모든 대본을 외우고 있는 남주 역할을 맡을지 기로에 서게 된다. 자신의 애마를 기가 막히게 잘 모는 미사키와 이미 친구처럼 친해진 가후쿠는 그녀에게 그녀의 고향 홋카이도의 한 시골 마을로 가자고 한다.

차를 좋아하고 실제로 일본에서 1,000 km 정도를 쉬지 않고 달려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와닿는 장면이었다.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는 대략 2,000 km. 미사키는 덤덤한 표정으로 날을 새가며 이 길을 운전하고, 아내가 쓴 대사를 무대에서 연기하다 트라우마로 인해 연기자 생활을 그만 둔 가후쿠는 그 긴 드라이브에서 차를 통한 치유와 생각 정리를 시도한다. 그 긴 여정에서 가후쿠는 자신의 비밀을 약간 털어놓고, 미사키도 자신의 트라우마를 말해 준다.

원래 미사키는 집이 산사태로 매몰되 엄마가 죽어 남아 있던 차로 무작정 달려 온 곳이 바로 히로시마였고 거기서 차가 고장나 할 수 없이 정착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산사태로 무너진 집에서 홀로 빠져나와 집에 갖힌 엄마를 위해 구급대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엄마의 폭력에 시달렸고 운전도 술집을 운영하는 엄마를 저녁에 데려다 주고 새벽에 데리고 오기 위해, 즉 엄마의 기사 역할을 위해 중학교때부터 맞으면서 배운 것이었다. 영화에서 남주가 중력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운전을 잘 한다고 미사키를 칭찬하는데, 그 이유가 뒤에서 자고 있던 엄마가 깨면 자신을 심하게 때렸기 때문에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무중력 운전을 스스로 익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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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키로미터를 달려 도착한 미사키의 집터는 폐허 그 자체로 집터를 알아보기도 힘들다. 그곳에서 가후쿠는 자신이 두려움에 맞서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미사키는 자신의 엄마가 이중인격자였다며 인간으로서 고뇌하던 오토, 딸을 잃고 슬퍼하고 섹스와 오르가즘을 통해 각본을 쓰고 다른 남자를 탐하는 오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달래며 다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가후쿠는 자신이 아끼던 애마를 처음엔 할 수 없이 미사키에게 맡겼지만 차 안에서 대본 연습을 하는 가후쿠를 거슬리지 않는 그녀의 묵묵함과 운전 실력으로 인해 점차 가까워지고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의 장거리 드라이브를 통해 결국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내가 고독과 생각정리를 하던 나만의 차가 두 사람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고 결국 내 마음도 그녀가 운전하게 된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자 영화의 제목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는 그런 인간 심층의 내면과 상처를 차를 매개로 치유하고 공존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사키는 갑자기 한국의 송도로 보이는 곳에 나타나 마트에서 먹을걸 사서 댕댕이를 뒤에 태우고 가후쿠의 빨간색 사브를 몰고 어딘가를 향한다. 한국이 두 사람이 거처가 되었는지 한국에서 가후쿠의 연극을 장기 연출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나, 일본에서는 도로방향과 반대였던 가후쿠의 좌핸들 차를 한국에서 정방향으로 운전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애마를 생활용으로 쓰게 내줄 만큼 두 사람이 분명히 가까워졌음을 암시한다. 

나에게는 차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일본에서 홋카이도와 혼슈를 끊임없이 달렸던 감성까지 더해져 너무나 좋은 영화였다. 하루키의 원작과 감독의 연출, 배우들의 연기가 빛났음은 물론이다. 2시간 30분의 런타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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