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경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본 후 오랜만의 브릿필름이다. 당시 다니엘 블레이크 역의 데이브 존스(Dave Johns)의 무표정으로 펼치는 감정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이 영화는 다분히 사회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해보며 완고하면서 성실한 남자의 삶을 펼쳐보게 했었다면, 오늘 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는 인간이 가진 사랑과 사랑에 얽힌 욕망을 인생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펼쳐놓은 수작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영화는 영국인 작가 줄리언 반스(Julian Patrick Barnes)가 2011년 8월 4일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이 소설은 발간한지 단 3개월만인 2011년 10월 맨부커상(Man Booker Prize)을 받는 기염을 토한 바 있다. 그 소설이 6년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것이다. 이 소설은 One, Two로 나뉘어진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두 파트 다 주인공 토니 웹스터(Tony Webster)의 내면적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One은 1960년대 주인공의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시절을, Two는 60대가 된 주인공의 현재 시점으로 이루어진다. 영화는 이 소설의 구성을 많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흐름과 영화의 흐름이 거의 일치하고, 에피소드도 거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단, 독백으로만 되어 있던 대사를 등장인물간의 대화로 풀어내고, 베테랑 연기자들의 내면연기를 담아내어 영화적인 장점을 많이 살렸다.
연출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인 리테쉬 바트라(Ritesh Batra)가 맡았다. 인도 뭄바이 태생으로 2013년 런치박스(The Lunchbox)로 깐느 그랜드 골든 레일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에게 이번 작품은 런치박스에 이은 두 번째 장편이므로,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다. 단 한 편의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맨부커상 수상작 연출의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이 영화는 모든 장면에서 영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주인공과 절친 2명은 전학 오자마자 까다로운 역사선생님의 질문을 철학적으로 맞받아친 수재 에이드리언(Adrian)과 금방 친해지고, 넷은 함께 어울려 다니기 시작한다. 이들은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에이드리언은 캠브릿지 대학에, 주인공은 브리스톨 대학에 진학한다.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은 평범한 남자들끼리의 우정으로 그려지는데, 물론 가벼운 면도 있지만 일탈이나 반항 없이 그들의 인생과 철학에 대해 상당히 깊이있는 대화가 오간다.
그리고 이 두 친구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인공의 첫사랑이자 에이드리언의 (아마도) 첫사랑인 베로니카(Veronica)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이 운명의 여인과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둘은 바로 서로에게 끌린다. 그녀는 라이카 카메라를 좋아했고,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그 카메라를 주인공에게 선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0이 넘은 현재 은퇴한 주인공 토니는 라이카를 중심으로 한 작은 카메라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결국 둘은 하룻밤을 보내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그날 이후 둘은 감정적인 갈등에 부딪히고 결국 헤어진다. 영화에는 둘이 악감정으로 치닫는 장면도, 헤어지는 장면도 나오지 않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토니는 베로니카를 만나고 얼마 후 그녀의 집으로 초대받고, 주말을 거기서 보내게 된다. 오빠 역시 캠브리지에 다니는 수재인 이 집안에서 주인공은 그녀의 부모들의 질문에 다소 주눅들고 긴장하지만, 그런대로 좋은 시간을 보낸다. 시를 전공하는 주인공과 문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다음날 일어나보니 집에는 자기 혼자뿐이다. 아침을 먹으려 냉장고를 뒤지다 그녀의 어머니와 마주치고, 베로니카 등이 산책을 나가며 그가 자도록 내버려두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엄마는 베로니카에게 너무 끌려다니지 말라는 묘한 대사를 던지고, 주인공은 의아해한다.
그러나 이 주말여행에서 정작 중요한 장면은, 주인공이 도착해서 방으로 안내받은 후 그녀의 엄마에게 매력을 느끼는 장면과, 베로니카가 굿나잇 키스를 하며 그를 유혹하는 귓속말을 한 후 혼자서 자위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토니가 가진 사랑과 욕망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이후 스토리를 풀어가는 큰 축으로 작용한다.
이 욕망과 사랑의 감정은 토니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엄마 사라는 그와 헤어지며 볼에 친밀한 키스를 하고 남편 몰래 그에게 손인사를 건넨다. 이 장면은 이후 벌어지는 비극을 암시하는 동시에, 인간이 가진 욕정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영화는 인도인 우편부가 배달해온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원작에서는 이것이 Two의 첫 부분이다. 완고하고 고집센 늙은 할아버지 느낌을 풀풀 풍기는 주인공은 무뚝뚝하게 우편물을 받는데, 이게 뜻밖에도 베로니카의 엄마 사라가 사망했으며 자신의 앞으로 약간의 돈(원작에서는 500 파운드)과 두 개의 서류를 남겼다는 내용이었다. 40년간 잊고 있었던 이름을 듣고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변호사에게 향하지만, 그 서류는 의외로 절친이었던 에이드리언의 일기였고, 그 일기를 베로니카가 가져갔다고 듣는다. 그는 변호사를 통해 수차례 일기를 돌려달라고 요청하지만 베로니카는 거부하고, 베로니카의 연락처도 개인정보를 함부로 알려줄 수 없다는 변호사의 입장에 막혀 얻는데 실패한다.
여기서 원작과 영화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때까지 토니가 갖고 있는 베로니카와 사라의 기억은 아름답기만 하다.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은 서정적인 영국의 풍경과 함께 로맨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기억은 현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가 많은 공을 들인 스토킹을 통해 베로니카 뒤를 쫓아 그녀와의 만남을 요청하고 당당히 사라가 남긴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요청할때까지도 그는 그가 저지른 비극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토니에게 베로니카는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었다. 이렇게 영화는 우리가 그들에게 상처준 기억, 그들이 우리에게 상처준 기억을 서로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실을 충격적인 진실을 조용히 폭로하며 일깨워준다.
그러나 40년만의 만남에서 베로니카는 슬픈 눈빛으로 그에게 법적으로 그 일기를 가질 권리는 있지만 도덕적으로는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진다. 그녀는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태워버렸다며 대신 이걸 읽으라고 한 통의 오래된 편지를 주고,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떠난다. 토니의 스토킹은 계속된다.
추억속의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그녀는 이제 그늘진 얼굴을 한 슬픈 표정의 할머니가 되어 있다. 그 역시 젊은 시절 훈남에서 지금은 완고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영화를 보며 내가 세월이 흘러 과거의 사랑을 떠올릴때 감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토니는 베로니카가 준 편지를 읽고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가 갖고 있던 기억이 너무나 단편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약간의 스포일러지만, 원작을 믿고 이야기하자면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와 사귀었고, 둘은 그 사실을 편지로 토니에게 알렸으며, 토니는 분노해 둘에게 저주와 악담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을 궁지로 내몰았고, 커다란 비극을 낳게 된다. 토니는 베로니카가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며 자신을 한탄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그녀에게 사과하고 관계개선을 시도한다.
이 영화를 보며 인상깊었던 것은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교차편집이나 동시편집이 아닌 순차편집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위 사진들과 같이 같은 장면에서 젊은 날의 그와 현재의 그가 출연하는데,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감정이 직선적으로 다가오는 장치였다. 이런 순차편집 장면들은 곳곳에 나오며 관객들이 주인공의 과거에 몰입하게 한다. 그리고 40년 후의 토니와 과거의 토니의 감정의 변화를 잘 느끼게 해준다.
오래전 이혼한 전처와 혼자 임신한채 살아가는 딸이 있는 토니는 베로니카, 에이드리언과의 이별 후 40여년만에 잊고 있던 가족과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입이 무거울 것 같았던 그는 출산을 앞둔 딸에게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스스럼없이 고백하고, 딸은 이때부터 아버지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일 중독인 전처 대신 딸의 출산을 끝까지 지켜보며 위로한 토니는 이제 가족들과, 그리고 그가 말할 수 없이 상처입힌 베로니카와 새로운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알 수 없는 묘한 여운이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는 영화였다. 인간의 욕망과 감정, 사랑과 증오, 화해와 용서를 적나라하게 그렇지만 조용히 파헤치는 상당히 임팩트 있는 영화였다. 현실적으로는 역시나 상영관이 적고 시간도 맞추기 어렵지만, 인생에 걸친 인간관계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하는 수작이다. 베로니카와 토니의 아름다운 젊은 시절의 사랑과 증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인생 황혼기의 내면이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누구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것만 같다.
[참고]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The_Sense_of_an_Ending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Ritesh_Ba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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