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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하지가 편지에 "이승만은 son of bitch"라고 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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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장군이 자신의 정치고문이었고 이승만과도 친밀했던 굿펠로 대령에게 쓴 1947년 1월28일자 편지가 이와 관련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전략) 그 노인네가 작년에 한 배신행위는 내게는 힘들고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 미국의 노력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지난 수개월간 그가 뭔가 의심스러운 일을 크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충분히 신임을 주었고 심지어 미국에 가서 한국의 정세, 그리고 통일된 한국 독립을 이루기 위해 뭔가 결정적 행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주의깊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러주었습니다.

나는 그를 ‘한국의 위대한 애국자’로 적당히 키워주어서 미국의 주목을 끌면 그것이 한국에 우호적 영향을 줄 것이고, 또 이곳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행동에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그가 미국에서 하려는 주된 작업이 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승인받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그는 봉기와 혁명을 일으켜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남한 정부를 수립하게 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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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그에게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더는 통하지 않고 지금은 한국 독립을 위해 뭔가 전향적 조치를 해야 할 때임을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신탁통치’ 문제를 언급하거나 러시아인들과 모스크바 결정을 비난하지 않도록 자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 그와 그의 부인 사이의 암호화된 교신 전보들은 그의 행동과 의도를 보여주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입니다. 그의 거창한 계획은 1월18~20일 사이에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았습니다. 이제 봉기일은 3월1일로 바뀌었고, 김구가 이승만의 혁명 계획을 이용해서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반탁’ 구호를 내걸 것이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국인 몇명이 피를 흘리게 만들어서 미국인들 사이에 미군 철수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승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한국인들을 향해 했던 거창한 약속들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음으로써 체면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고, 더하여 왕이 되고야 말겠다는 과도한 집착 때문입니다. (…)

그가 도쿄에 갔을 때 맥아더 장군은 그를 만나기를 거절했고, 그의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그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노인네는 출발을 하루 늦추면서 계속 맥아더를 귀찮게 했고 맥아더는 몇분간의 알현을 허락했습니다. 그가 맥아더를 잠시 봤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자리를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맥아더를 인용하면서 맥아더가 지금 이곳에서 미국인들이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떠벌리며,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그들이 하려는 노력과 관련해서 본국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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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 목적 중 하나는 정치자금

하지는 이 편지에서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과 불쾌감을 육두문자까지 섞어 가며 원색적으로 토로했다. 그는 지난 1년간 이승만을 우익 통합의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의 세력을 확대시켜 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미국행을 주선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기대와 달리 미국에서 하지를 제물로 삼아 그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선전 캠페인에 분주했다. 하지 장군은 완고한 반공주의자이자 ‘냉전의 용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태평양전쟁에서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한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그런 하지가 자신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이승만에게 분노했을 거 같지는 않다. 편지는 하지가 1947년 1월의 시점에서 지난 1년간 그와 이승만의 관계를 총평하고 있고, 양자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배경과 이유를 보여준다.

이승만은 방미 목적으로 대(對)유엔 외교를 내걸었지만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12월8일에는 유엔총회가 이미 더 이상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한 상태로 폐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정의 한 보고서는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이 일부러 유엔총회가 폐막될 때까지 개최지인 뉴욕에 가는 것을 피했다고 분석했다. 이승만 진영의 유엔 외교는 의제 상정보다는 미국과 남한 언론을 향해 그의 정치적 계획을 선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의 또 다른 방미 목적에도 주목했다. 이승만의 여행경비를 빌미로 한 정치자금 모금이 더 주요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민족대표외교후원회 재정부장인 한민당의 김양수는 20억원 조성 계획을 미군 정보원에게 언급했고, 시중에는 이승만이 약 1억~2억원을 모금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 모금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영수증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도미외교 후원금 조성액은 약 1470만원이었다. 이승만의 도미를 빙자한 정치자금 모금은 무리한 할당식 강제징수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우익단체들이 후원비 명목으로 동회(洞會)를 통해서 가구당 100원 또는 50원씩 기부할 것을 강요하고, 기부에 응하지 않으면 쌀 배급을 중지한다고 협박한 사건들이 12월 내내 도하 신문을 장식했다. 영수증철에 이름을 올려놓은 저명한 정치가들과 경제인들이야 그들이 기부한 후원금이 보험료이자 투자였겠지만 쌀 한 됫박이 아쉬운 민초들에게도 보험료가 필요한 세태가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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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2억원 모았다 소문 돌아

이승만과 하지 사이를 오가던 미국인 정상(政商)에게는 한국인들이 일으킨 ‘쌀 소동’이 그저 쌀값이 올라 한국인들이 과민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쌀값 폭등은 점령군의 경제정책 실패로 빚어진 결과였지 원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기와 빵은 식료품으로서 위상도 다르지 않은가. 편지에 언급된 빌보아(Bilboa)는 아마 빌보(Bilbo)의 오타가 아닐까 싶다. 비슷한 시기에 빌보아라는 성을 가진 정치인은 미국에 없었지만 대신 시어도어 빌보(Theodore G. Bilbo)라는 상원의원이 있었다. 빌보는 미시시피주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노골적으로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했다.

굿펠로는 10월항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하지를 위로한답시고 유머를 섞어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했다. 미군정의 양곡정책을 한국인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을 미국에서 육류와 관련된 정부 정책에 사람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데 견주고, 한국에서 여운형 같은 이들이 미군정의 골치를 썩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미국에선 빌보 같은 이들이 정부의 골치를 썩이고 있지 않느냐고 비유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2차대전 중 식량배급정책이 시행된 적이 있고, 1946년 말까지 일부가 시행되었던 만큼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 비유였을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에게 민생이란 개인의 정치적 야심이나 당리당략을 위해 동원되는 수사와 비유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민초들에게 민생이란 그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자 당면한 먹거리의 문제였고, 또 정치였다. 민초들이 일상의 정치로부터 퇴출되자 동회가 정치인의 정치자금이나 갹출하는 조직으로 변했다.

출처는 이 기사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댓글들이 정확히 말해주는 것 같다.

인류역사 최초로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휴전협정에 사인하지 않았고, 625가 발발하자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신은 부인과 함께 기차를 타고 야반도주했으며, 독재와 강압 뿐만 아니라 쌀값 폭등 등 경제에도 완전히 실패했던 이승만은 419로 탄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를 국부로 숭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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