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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 엘르 리뷰 - 현실적 무표정연기의 끝판왕이 보여주는 인간의 관계성과 폭력성의 함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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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영화] 엘르 리뷰 - 현실적 무표정연기의 끝판왕이 보여주는 인간의 관계성과 폭력성의 함수 (1)



영화를 보면서 배우의 힘을 느낄 때가 있다.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주로 타고난 외모, 노력으로 가꾼 몸매, 캐릭터를 소화하는 매력이 남다른 점 등에서 그런 힘을 느끼지만, 오늘 본 엘르처럼 상영관과 시간이 적은 일종의 예술영화를 볼 때 저 배우는 대체불가의 배우구나 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필자가 오늘 이자벨 위페르를 보면서 받은 느낌이 그렇다. 사진은 1978년 비올렛 노지에르로 깐느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의 모습이다. 젊은 시절이었던 이때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40년 후인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몰입도 높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1953년 생으로, 1971년 데뷔하여 지금까지 약 1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이다. 세자르 어워드에 역대 최다 노미네이트(16회)된 배우로 2번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깐느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한 4명 중 한 명이다. 

그 중 한 번은 피아니스트(La Pianiste , The Piano Teacher , 2001)였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다. 


이 외에도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한 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는 등, 무수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유럽 굴지의 배우이다. 그 이력을 인정받아 1994년 프랑스 국가공로장(Ordre national du Mérite), 1999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를 수상했다. 

근래 본 영화 중엔 다가오는 것들(L’avenir, Things to Come, 2016)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아주 좋은 연기를 펼쳤다. 남편이 제자와 결혼겠다며 이혼하고 자식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그나마 정신적인 교감이 있다고 믿었던 후배와도 멀어져야만 하는 혼자가 된 중년 여성을 연기했는데, 극단적이지 않고 담담하게 보이지만 항상 쓸쓸하게 보이는 연기가 웬만한 내공 없이는 나오기 힘든 거라고 생각했었다.


엘르는 상당한 수작으로 각종 영화제를 휩쓸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여우주연상이었다. 그만큼 배우의 힘이 대단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게임개발사의 사장이다. 그녀는 절친과 함께 출판사를 경영하다 게임회사를 창업해 성공한 인물로 등장한다. 절친도 여성이고 대부분의 직원은 남성이다. 남편과는 이혼했으며 아들이 하나 있는데 못되고 이쁜 여자에게 빠져 아이를 낳고 결혼하려고 한다. 실제 낳아보니 피부색이 달라 유전자 검사를 해서 친부를 가려야 할 상황이지만 아들은 여자에게 빠져 자기 아들이라고 믿고싶어 한다. 그리고 이웃에는 독실한 카톨릭 신봉자를 아내로 둔 부부가 살고 있다. 차는 아우디이고, 부촌에 살면서 아들에게 차와 집세를 내줄 정도로 부유하다.


그러한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까? 영화는 첫 장면을 강간 씬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난데없이 침입한 괴한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일어나 깨어진 그릇을 치우고 바로 평상시처럼 행동한다. 한동안 절친들과 가족들(따로 살지만)조차 모를 정도로. 그러다 저녁모임에서 갑자기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리고, 친구와 전 남편 등은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때문에 그녀는 경찰을 회피한다. 그리고 이 일을 직접 해결하려고 한다. 호신용품을 구입하고 주변을 감시하지만, 보통의 영화처럼 긴박감 넘치는 음악과 주인공의 불안심리를 표출하는 연출은 아예 없다. 모든 것이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영화는 그렇게 흘러간다. 어두운 사무실에서 야근하며 용의자일지도 모르는 건장하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남자직원과 단 둘만 남아있어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며 그 직원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슬쩍 감시하기도 한다.

범인은 누군지  모른다. 회사에서 의견충돌이 잦은 남자 직원인지, 아니면 자기를 좋아하는 다른 직원인지, 사이코패스였던 아버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가족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지...이런 스토리가 전개되며 그녀의 회사에서의 직원들과의 관계, 동업자와의 관계, 동업자의 가족들과의 관계, 전 남편과 그의 새로운 애인과의 관계, 아들과 아들에게 붙어 있는 못된 애인과의 관계, 이웃집에 사는 부유하고 행복해보이는 부부와의 관계, 그리고 그녀의 트라우마인 사이코패스였던 아버지와 젊은 남친과 동거하며 성형수술을 밥먹듯 하는 엄마와의 관계들이 펼쳐진다.


이 관계들 사이에서 그녀는 화도 내고, 욕망도 서슴없이 드러내며, 지속되는 폭력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 폭력은 물리적인 것 뿐만 아니라 문자와 대화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관객들에게 서서히 밀려온다. 웅장한 사운드와 CG와 함께 펼쳐지는 장면이 아닌 스토리와 미장센, 일상적인 대사와 장면들로 이것들이 전달된다.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과 현실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 집으로 초대해 이쑤시개가 입에 걸리도록 조작된 음식을 내어주고 일부러 그의 파트너를 상처주기 위해 숨겨왔던 관계를 갑자기 폭로하기도 한다. 엄마는 밉상이라며 화를 내고 모욕하기도 한다. 감독은 이렇게 서로 상처와 행복을 주고받는 인간관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냥 볼땐 멀쩡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지만 비틀어진 성욕을 갖고 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를 물리적 폭력과 연결시킨다.

감독은 이런 장면들을 적절히 배합하고 배우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억지로 지어내는 표정이나 눈빛이 아닌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한 무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근래 본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 , 2016)의 케이시 애플렉,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 2016)의 데이브 존스가 보여주었던 연기도 이렇게 현실적이었는데, 남자들이 보통 감정표현을 과도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에 그녀가 폭력의 피해자로서, 또 가해자로서 보여준 연기는 여자로서는 아주 소화하기 힘든 베테랑 배우의 진수라고 할만했다. 여성으로서 폭력을 당하고 이를 어렸을때부터 상처받으며 살아온 주인공이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조용히 관객들에게 질문하는 듯하다. 경찰도 믿지 못하고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냥 참아내기도 어려운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묘한 재미다. 주인공을 지켜보면 사람에게 끌려 가까워지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인간이 사회에서 만들어진 관계에서 받을 수 밖에 없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관계가 보다 잘 발전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원작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영화를 통해 만난 원작은 분명히 좋은 작품일거라고 생각된다.

두 명의 베테랑 감독과 배우가 만나 만들어진 이번 작품은 전세계 영화제를 휩쓸며 수작으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영관수로 보면 거의 제3국 영화 취급을 받고 있지만 세계적인 수작임에 틀림없다. 가끔은 깐느 수상작 정도는 극장에서 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였다. 이런 영화들의 상영관이 더욱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참고]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7067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Isabelle_Huppert#Awards_and_nomi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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